초당 9GB 이상의 읽기/쓰기 속도를 실현한 SSD「마이크론 X100」이 등장 일반 H/W관련




 미국의 대형 반도체 제조업체인 마이크론은, 인텔과 공동 개발한 3D XPoint 기술을 통해 초고속 전송 속도와 초저지연을 실현한 SSD인「마이크론 X100」을 발표했습니다. 

X100 NVMe SSD
https://www.micron.com/products/advanced-solutions/3d-xpoint-technology/x100

Micron Finally Announces A 3D XPoint Product: Micron X100 NVMe SSD
https://www.anandtech.com/show/15029/micron-finally-announces-a-3d-xpoint-product-micron-x100

다음 동영상을 통해 Micron X100이 어떤 SSD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Introducing the Micron X100, the world's fastest SSD. - YouTube


3D XPoint 기술을 이용한 저장 장치로는 지금까지 인텔에서 Optane, 마이크론에서는 QuantX 등의 브랜드를 발표했었는데 이번에 Micron은 아주 심플하게 「X100」이라는 제품명을 내놓았습니다. 



3D XPoint 기술을 통해 시퀀셜 전송 속도가 읽기/쓰기 모두 초당 9GB의 고속 액세스를 실현함으로써, 기존의 SSD를 크게 뛰어넘어, 휘발성 메모리인 DRAM에 육박하는 전송 속도를 가진 SSD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규격은 SATA보다 훨씬 빠른 NVMe로, x16 레인의 PCIe 슬롯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사양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마이크론이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4KB 랜덤 리드 성능이 2.5M IOPS에 달한다는 벤치마크 결과가 나옵니다. 



또한 지연의 원인인 레이턴시도 일반적인 SSD의 1/11 으로 크게 낮아졌습니다. 


발매 시기 등 자세한 사항은 이 기사를 작성하는 시점에서는 불명확하나 하드웨어 전문지인 AnandTech는「마이크론 X100은 2019년 10월~12월에 걸쳐, 일부 유저를 상대로 시범적으로 제공될 에정이므로 곧, 저장 장치 시장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며 2020년 이후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게임 제작에서 중시해야 할 8가지 요소 게임S/W관련


By seventyfourimages

 학생 시절 8개의 Flash 게임을 만들고 총 2,500만 번 이상 플레이된 게임의 광고 수입을 통해 2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둔 테네시 대학의 조교수인 오스틴 헨리 씨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실제 게임 제작에서 중시해야 할 8가지 사항을 소개했습니다.

The 8 lessons I learned from releasing 8 video games - Austin Z. Henley
http://web.eecs.utk.edu/~azh/blog/8lessons8games.html

◆1:다수의 프로덕트를 만들자

 가능하면 적은 설계 공수로 다양한 프로토 타입을 작성하는 것은 좋은 연습 거리가 되며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헨리 씨는 말합니다. 헨리 씨는 8개의 Flash 게임을 만들면서 100종류 이상의 프로토 타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프로토 타입을 만들 때 각각의 코드를 라이브러리화해두어 이전 프로토 타입에서 소스 코드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함으로써 제작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2:많은 플레이어들의 피드백을 듣자

 게임을 출시했다면 초기 단계부터 플레이어들의 꾸준히 피드백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 사람에게 게임을 10분 정도 즐기도록 하기만 해도 다양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으므로 게임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피드백을 받아야 합니다. 말이나 글로 된 피드백은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고 내용을 잘못 해석할 가능성도 있으므로 「튜토리얼을 스킵하지는 않았는지?」「조작 방법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는지?」 등 플레이어가 어떻게 게임을 조작하는지 직접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By Rawpixel

◆3:플레이어 탓으로 돌리지 말자

 게임을 즐겼던 플레이어에게서 불평을 듣거나 플레이어가 게임을 즐기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에 플레이어 측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며 플레이어를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헨리 씨는 말합니다. 과거에 헨리 씨가 만든 Flash 게임에 「뮤트 버튼이 없다」라는 불만이 제기되었는데 헨리 씨는 이 불만을 무시하고 게임을 계속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게임에서도 동일한 불만이 제기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게임에서는 게임의 룰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플레이를 포기한 플레이어가 발생했다는 점을 인식했으면서도 그 문제를 무시하고 게임을 제작했다가 게임 플레이어 수가 증가하지 않았던 사례도 있었습니다. 게임 설계가 잘 되지 않을 때는 보수적이 되지 말고 게임을 개선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와 관련된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고 헨리 씨는 말합니다. 



By seventyfourimages

◆4:참신함에 집착하지 말자

「다른 게임과 다른 것」이란 점에만 집착하여 참신함만 추구하면 주변을 볼 수 없게 되어 당신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게임이 되고 맙니다. 참신함을 창출하기 위해  너무나 긴 시간을 소모했다면 잠시 생각하기를 멈추고 레슨1로 돌아가야 한다고 헨리 씨는 주장합니다. 기존의 아이디어를 개선해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사실, 참신함을 추가하는데에는 그에 따른 결점이 있고 참신함을 가진 요소를 이해시키려면 먼저 기존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참신함이 어떻게 훌륭한지를 플레이어에게 설명하면서 이해시켜야 합니다. 



By Pressmaster

◆5:계속해서 가다듬자

 헨리 씨는 아이디어를 몇 번이나 가다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애니메이션이나 파티클 이미너, 사운드 이펙트를 추가하기 위한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시중에 출시된 게임을 관찰하고 자세한 부분까지 주의 깊게 플레이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By seventyfourimages

◆6:여러 가지 수단을 모색하자

 헨리 씨가 게임에서 얻은 수입은 Mochi Media라는 광고 회사를 통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Flash 게임에는 광고 API가 내장되었고 게임의 업데이트를 알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수익은 금방 0달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수익은 1곳의 회사에서 발생했으며 제작했던 게임 중 2가지의 광고 뷰가 전체의 85%를 차지했습니다.「더욱 비지니스적인 측면을 더욱 고려했다면 페이스북 등 다른 광고 API나 기타 수입원(웹사이트나 게임 브랜드 숍 등)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헨리 씨는 말했습니다. 수입을 얻는 방법이든, 게임 아이디어든, 시야를 좁게 잡아서는 안 됩니다. 



By BrianAJackson

◆7:자신이 만든 게임을 직접 즐겨보자

 게임 개발에서 발견한 최고의 테스트 방법은 「자신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라고 헨리 씨는 주장합니다. 자신이 만든 게임을 자기자신이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 게임을 즐기도록 권할 수는 없으며 또한 게임에 착수할 의욕이나 열정을 유지하기란 어려우므로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세요」라고 헨리 씨는 말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개밥먹기라고 불리는 방법입니다. 



By vadymvdrobot

◆8:플레이어가 반복해서 플레이하고 싶어지는 요소를 만들자

 예를 들어 스킬 트리 등으로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즈하거나, 반복된 연습을 통해 숙달되는 스킬을 포함하거나, 스코어의 랭킹화 등을 통한 플레이어 간 경쟁 요소 등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게임 내 상황이 변화하는 요소, 중독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기적인 가치를 플레이어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헨리 씨는 주장합니다. 「누가 겨우 5분 동안 즐기는 게임을  친구에게 소개하겠어요? 그 게임은 결국 잊혀질 것입니다」라고 헨리 씨는 말합니다. 게임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플레이어가 게임 내 상황을 좋게 풀어나갈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합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계속 즐기면 플레이하지 않을 때라도 그 게임에 대해 생각하게 되어 친구에게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또한 헨리 씨는 플레이어를 중독시키기 위해 심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플레이어에게 유익한 가치를 제공하는 방안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By Rawpi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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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이 '노부나가의 야망'은 시뮬레이션 게임 역사상 특이점인가? 인류가 게임을 통해 전쟁을 시뮬레이션했던 역사를 돌아본다. 게임S/W관련

시뮬레이션이란 실제로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가상의 모델을 만들어 조작할 수 있도록 한 모의 실험을 말한다. 그리고 시뮬레이션 “게임”(이하 SLG)이란 거기에 오락성을 부여하여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한 컴퓨터 게임 장르이다.――
 그럼 오늘부터 본 연재를 통해 SLG이는 장르의 역사를 해설하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의」를 보고도 알 수 있듯이 SLG은 액션이나 어드벤처, RPG와 같이 「하나의 큰 덩어리」로 다뤄지기 쉽다. 「가장 좋아하는 게임 장르」 등의 앙케트에서도 「SLG」 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합쳐지는 상황을 종종 보곤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image by Will Wright, Maxis Software/Electronic Arts (original software); Don Hopkins, DUX Software (Unix port); Tomhannen (take screenshot); bayo (remove last reference to SimCity) [GPLv3], via Wikimedia Commons 

예를 들어 「삼국지」 시리즈는 역사 SLG, 「심시티」 시리즈는 도시 경영 SLG, 그리고 실제 파친코 기기를 재현한 「파치오군」 시리즈는 파친코 SLG이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제각각인 집합을...  「파치오군」과 「삼국지」를……어떻게 동일하게 취급한단 말인가?

 그렇다, 시뮬레이트=「모방하는」 대상이 되는 「현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되므로 SLG을 다루는 방식도 광범위해져 산만해지는 경향을 피하기 힘들다. 
 그래서 본 연재 SLG편 제1회에서는 역사적으로 논의를 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원조 SLG」라 할 수 있는  「워(전쟁) 게임」이다.
 워 게임이 SLG의 원점인 이유는 간단하다. 원리적으로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SLG이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드라이빙 게임이나 비행기 시뮬레이터는 실제 기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재현하는 계산 능력이 필요하며 주사위 등 아날로그적인 수법을 이용해서 그러한 계산을 실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 경영 SLG는 어떤가 하면 사실 이 분야도 컴퓨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산을 최적으로 분배하고……등등 외부와 관계 없이 조직 내에서 완결되는 「1인 게임」의 비중이 큰 경영 SLG는 역시 PC나 게임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Image by Chunky Rice.  Licensed under the terms of cc-by-3.0.) 
물론, 호텔 체인의 투자와 합병을 주제로 한 고전 보드 게임인 『어콰이어』는 경영 SLG에 가깝다. 하지만 「여러 플레이어가 겨룬다」라는 체제를 갖추고 한정된 파이를 쟁탈하고 주식을 사서 다른 사람의 체인에 편승한다 라는 플레이 방법은 역시 기존 보드 게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워 게임도 역시 인간끼리의 투쟁을 원형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플레이어가 「국가」나 「군대」를 연출한다고 한다면 워 게임은 「전쟁의 모방」이 된다. 여기에서 인간 플레이어 한 사람을 컴퓨터로 치환한다면 가장 원시적인 전쟁 SLG이 탄생되는 셈이다.



그러한 워 게임을 기점으로 한 초기 SLG에서 일본 여명기의 위대한 완성점은 초대 『노부나가의 야망』일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PC용 워 게임은 존재했었고 『노부나가의 야망』이 일본 최초의 SLG은 아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기록했고 일본에서 「액션성이 없는 SLG」이 정착되는 기반을 만든 개척자는 바로 노부나가의 야망이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대단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곧 다루기로 하고  그럼 우선 컴퓨터 게임 이전의 워 게임의 행보를 만나보자.

미국에서의 워 게임의 발전과 일본 상륙

먼저 워 게임이 보급된 시작 지점을 확인하자.
 시기로 본다면 1954년――찰스 S. 로버츠가 최초의 상업 기반으로 평가되는 워 게임 『택틱스』를 자비 출판한 해가 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전쟁에 대한 관심의 고조로 워 게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나 일반 대중에 보급되기 시작된 시점은 여기라 보면 될 것이다.
 그러한 상업적 성공에 의해 1958년에 창업한 아발론힐은 이 작품을 개정하고 같은 해에 『택틱스Ⅱ』를 개발한다. 이것은 「대전략」개발 비화에서 개발자 중 한 사람인・후쿠다씨가 언급했던 내용이다.

 『택틱스』가 새로웠던 점은 「전략」면에 집중했던 것이다. 워 게임의 역사는 미니어처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아무래도 휴대하거나 반복해서 플레이하기에는 지나치게 불편한 점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제작자들은 두꺼운 종이로 된 말을 사용하여 캐릭터성을 제거함으로써 워 게임이 가진 「전략성」을 세련되게 다듬었다.  구체적으로는 육각형 칸 「헥스」의 채택, 지배 구역(ZOC)이란 개념, 적과 아군의 전력 대비에 따른 전투 결과표, 지형 효과……등의 콘셉트를 도입하여 현대 전략 SLG의 기반을 굳혔다.

 또한 아발론힐에서 게임을 디자인했던 디시전 게임즈,웨스트엔드 게임즈 등의 그룹이 1970년대 초반부터 중반에 걸쳐 계속해서 워 게임 메이커를 탄생시키는 시대가 도래했다. 
 개리 가이각스가 직접 디자인한 워 게임을 기초로 한 RPG의 원점인 『던전&드래곤』(이하 『D&D』)을 개발・발매한 것도 이 시기이다. 「워 게임(의 유행)이 RPG를 키웠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Image by Moroboshi.  Licensed under the terms of cc-by-3.0.)※1 디시전 게임즈

진짜 군인들이 작전을 입안하기 위해 사용한 「작전 연습(兵棋演習)」에서 기원

그럼 이러한 워 게임의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전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예를 들어 워 게임을 「전쟁을 모의적으로 재현하는 유희」라고 정의한다면 그 기원은 기원전 고대 인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8×8=64칸의 반면에서 왕・코끼리・말・전차(혹은 배)・병사의 5종의 말을 움직이는 「차투랑가」라는 게임이 있었다고 한다. 유력한 설로 이것이 2명이 즐기는 룰로 바뀐 후에 수출된 것이 서양으로 건너가 체스로, 동양에서는 장기가 되었다라는 설이 있다. 그렇다곤 하나 장기나 체스는 추상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전장을 재현하는」 의미는 상당히 희석된다. 반대로 말해서 국가나 지역에 따라 다른 군대나 장비의 이미지를 희석해 「상상에 맡긴」 덕분에 국경을 넘어서 보급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말이다. 

(Photo by Getty Images) 
어쨌든 이러한 인류의 활동 중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전쟁을 「가상」으로 해결하려는 합리적 사고는 군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계승되었다――그것이 군사 연구에 사용되는 「작전 연습」이다.
 원래 체스의 룰을 유용했던 워 게임에 현대의 SLG와도 연결되는 요소를 도입한 것이 19세기 프로이센(과거의 독일) 육군의 라이스비츠 부자가 만든 「크릭스슈필」이었다.

 대결하는 2명이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다양한 지형을 모방한 지도 위에서 기병은 기병 나름대로, 보병은 보병 나름대로의 이동 속도로 움직인다……등의 요소는 그 이전의 워 게임과 변함없다.
 하지만 그 이전의 워 게임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요소도 있다――바로 「주사위의 도입」이다.
 적과 아군의 부대가 충돌하면 주사위를 던져 승패를 정한다. 전력이 큰 쪽은 그만큼 주사위의 눈에 수정값을 가산한다.  「대국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고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 않는 쪽이 항상 이기는」 체스에 도쿠오카 마사토시 씨가 말하는 「난수를 통한 쾌감」이 주입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크릭스슈필을 군대에 도입하여 보급시키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 당시의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였다는 점이다. 그는 적어도 전쟁 역사에 있어서는 뛰어난 점이 하나도 없던 왕이었다. 1806년에 나폴레옹 1세가 이끄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가 대패를 맛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크릭스슈필을 참모총장 뮈플링이 발탁했을 때 빌헬름 3세는 모든 연대에 세트를 갖추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의 육군대학에는 그 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의 참모총장인 몰트케도 있었다……그럼으로써 우선 SLG의 프로토 타입은 유용함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놀이」와 작전 연습이 합체된 미니어처 워 게임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프로페셔널 군인이 작전 입안하는 차원의 워 게임(의 원형)의 역사를 알아보았다. 그럼 일반 대중에 보급되진 않았다곤 하나 「일반인이 즐기려고 생각하면」 즐길 수 있는 워 게임 중 「가장 오래된 사례」는 무엇일까? 그것은 1892년에 영국에서 판매된 『제인 해전 게임』일 것이다. 작자는 프레드 제인이다. 세계 각국의 해군에 소속된 전함 등의 자료로 유명한 「제인 함정 연감」을 창간한 사람이다. 제인은 함선 정보 전문가이기 이전에 사실은 워 게이머이며 게임 디자이너였다. 실제로 「제인 함정 연감」도 원래는 자신의 해전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한 자료집으로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룰은 다음과 같다――배의 장갑과 대포의 위력에 랭크를 매기고 동일한 랭크의 대포라면 장갑을 관통할 수 있지만 관통력은 거리에 비례해서 낮아진다. 배의 명중 부분은 랜덤으로 결정되며 맞을 때마다 대미지가 축적되고 진행하면서 배는 침몰한다…….
 다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룰과 존재가 모두 잊혀 「제인 함정 연감」만 남았기 때문에 후세의 게임에 영향을 주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현대의 작품군에 직접 연결되는 「가장 오래된 워 게임」이라 불리는 것은 역시 H. G. 웰스가 제작한 『리틀 워즈』가 아닐까? 『타임머신』이나 『우주전쟁』 등의 고전을 통해 SF의 아버지라 불렸던 작가는 사실 워 게임 디자이너의 대선배이기도 했던 것이다. 



  『리틀 워즈』는 게임 지침서라는 형태로, 룰・소설・보충의 3부로 구성된다. 테이블 토크 RPG의 룰북과 리플레이가 세트로 된 느낌이다.
 룰은 아주 간단하다. 턴제로 구성되며 적과 아군으로 나눠진 두 사람이 대치하여 우선 한쪽이 모든 부대를 움직이고 다음으로 상대방이 군대를 움직인다. 보병은 1회 1피트, 기병과 포병은 2피트 이동. 포병은 스프링으로 초크를 날리는 장난감이며 6발의 탄수 제한이 있고 플레이어는 실제로 상대방을 겨냥해서 쏜다. 기병과 보병이 접촉했을 때는 동전 던지기로 승패를 결정한다. 
 다만 이 정도로는 지나치게 단순한데다가 게임 밸런스도 좋지 않았다. 즉, 운이 좋으면 한 명의 보병이 다른 유닛을 모두 무찌를 수 있던 것이다. 웰스는 그 개량 프로세스를 텍스트로 기록하고 지원이나 보급, 고립이나 포로 등의 추가 룰이 도입되어 완성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리틀 워즈』가 군사에 원점을 둔 워 게임의 흐름을 계승함과 동시에 역시 위에서 언급한  「미니어처 게임」의 발전형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미니어처 게임이란 요약하자면 어린아이가 군인 인형을 사용해 지휘관이 되는 「가상의 놀이」다. 19세기부터 주석으로 만든 군인을 이용해 전장을 재현하는 놀이가 있었는데 엄밀한 룰이나 특정 승리 조건은 없었고 순수하게  「움직이는 것」, 「싸우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웰스는 그 룰을 정비하여 지적인 흥분도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만든 셈이다. 
 기호가 적혔던 따분한 말이나 함선이 인격을 가진 「인형」이 되었다. 그러자 말이 캐릭터성을 갖게 되면서 감정을 이입하기 쉬워졌다. 반대 측면에서 어린이의 놀이였던 미니어처 게임에 룰이 도입되자 「인형 놀이」는 어른을 매혹시킬 수 있는 심오함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미니어처×워 게임의 결합은 직접적으로는 워해머 시리즈 등 현대의 미니어처 게임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말이 캐릭터성을 획득한 것은 나중에 워 게임으로부터 파생된 『D&D』 등 테이블 토크 RPG의 출현을 촉진했다 할 수 있다.  

Image by Arnaud Ligny.  Licensed under the terms of cc-by-2.0.) 

그것이 나아가서는 시뮬레이션 RPG, 즉 워 게임의 「지휘관」 시점과 캐릭터의 성장이나 생사를 중시하는 게임으로도 연결되었다……란 본 연재 조금 후에서 다룰 이야기다. 
 그렇다――원래 워 게임은 전장의 군인이 되는 「가상의 놀이다」. 이 시스템에 은근히 숨겨졌던 동심 속에는 처음부터 RPG 탄생이라는 싹이 잉태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의 워 게임의 역사

 피규어가 먼저인가, 워 게임이 먼저인가――그 후 SLG의 역사는 양자가 서로 지탱하며 발전하게 되었다. 처음에도 밝힌 것 같이 찰스  S. 로버츠가 제작한 최초의 상업 기반 게임인  『택틱스』는 그야말로 피규어의 성질을 버림으로써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반에 대한 보급 면에서는 「피규어」가 앞섰다 볼 수 있다. 즉, 일본에서 워 게임이 널리 보급된 계기를 만든 것이 전통 있는 모형 잡지인 「월간 하비 재팬」이었기 때문이다. 


 1969년 미니카 정보잡지로 창간된 월간 하비 재팬은 나중에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도 다루는 모형 잡지로 발전했다. 그 이유는 모체가 된 회사가 해외 완구나 하비 상품을 수입・판매하는 회사인 포스트 하비였기 때문이다. 실은 「해외 문화를 소개하는 창구(수입품 판매도 겸함)」라는 성격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잡지에서 미니어처 워 게임이 소개된 것은 1971년이었다. 「모델 솔저의 세계」라는 연재를 통해서였다. 스케일 모델 “만”을 만드는 것이 주류였던 당시의 밀리터리 모형에 정경을 집어넣은 디오라마도 즐기자고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 시점에서 워 게임은 어디까지나 부록이었다. 연재 초반은 디오라마 제작 방법이나 관련 사진, 역사 고증에 할애되었고 겨우 4회째에 게임이 언급된다. 그것도 병사 피규어가 만들어지는 문맥 차원에서  「30밀리 워 게임 스케일」이 열몇 줄 정도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 후 연재를 하면서 워 게임 그 자체의 소개, 나아가 오리지널 게임(룰)의 게재……등 점점 게임으로 중심축이 이동되어갔다.그러한 상황을 통해 독자들의 반응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연재는 총 6회로 1번 끝났으나 워 게임 관련 기사는 이름을 바꾸고 필자를 교체하면서 「월간 하비 재팬」 잡지상에서 바통을 이어 계승되었다. 그리고 1975년 4월 호에서 아발론힐의 게임을 수입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드디어 일본에서도 본격적으로 워 게임의 판매가 시작되었다.  

(이미지 출처 legal alien wiki) 

또한 매스미디어 분야에서는 「월간 하비 재팬」이 앞섰으나 워 게임 수입 분야에서는  「키야 통상(木屋通商)」이라는 업자가 앞서갔다. 이윽고 일본어로 번역하여 게임 판매를 다툴 정도의 「시장」이 탄생했다.
 참고로 시마모토 카즈히코 선생의 『아오이 호노오』 11권에는 『택틱스II』가 원 출처로 생각되는 「BACTICS-II」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호노오 모유루는 이동 전투 룰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서 고민했는데 사실 이러한 상황은 지금이라면 「초월 번역」이라 불릴만한 룰에 대한 빗나간 번역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19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이 되었다.
 NEC의 PC-8001과 후지쯔의 FM-8 등 어느 정도는 그래픽 능력을 갖춘 퍼스컴이 나온 시기였다. 

 
 이때 아직 수십만 엔이나 했지만 「워 게임을 표현할 수 있는 스펙을 가진 보급 하드웨어」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병사나 전차 등의 말은 기호화되어 작은 사이즈로 만들 수 있지만 적・아군이 대치하는 전장은  「넓이」와 「정밀함」이 필요하다. PC-8001의 해상도는 160×100도트로 지금 본다면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NEC의 이전 하드웨어였던 TK-80은 「8자리 글자 표시(LED)」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피규어와 종이 워 게임과 마찬가지로 퍼스컴용 워 게임도 「수입」되었다. 원조인 아발론힐이 발매했던 Apple II나 Atari800용 등의 게임이 일본 PC용으로 이식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키야 통상」도 이러한 작업을 담당했다. 

Image by Bilby.  Licensed under the terms of cc-by-3.0.)※1 TK-80


 정확히는 CSK 소프트웨어 프로덕츠가 판매를 맡고 키야 통상은 개발을 담당했을 뿐이었다. 여기서 전자는 물론 「그 유명한」 CSK의 자회사다. 일찍이 세가를 인수하기도 했던 CSK는 이 무렵부터 게임과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슬슬 본 주제로 들어볼까 한다. 
 처음에 완성점으로 설정한 『노부나가의 야망』의 탄생. 그것을 탄생시킨 코에이 마이컴 시스템(당시)은 그야말로 80년대에 SLG을 등장시킨 기업이다. 역시 코에이도 이러한 PC 워 게임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이어지는 내용

고전 게임의 소스코드를 다운로드 할 수 있는 「Game Source Code Collection」 게임S/W관련




 웹 페이지・소프트웨어・음악・책 데이터를 역사적 자료의 차원에서 온라인 상에 보존하는 비영리단체인 Internet Archive의 「Game Source Code Collection」 메뉴에 가보면 발표 후 일반에 공개된 컴퓨터 게임의 소스코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이선스는 소프트웨어에 따라 다양하지만 공개된 소스코드는 모두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Game Source Code Collection : Free Software : Free Download, Borrow and Streaming : Internet Archive
https://archive.org/details/gamesourcecode


Game Source Code Collection에 들어가 보죠. 소스코드를 확인하고 싶은 게임을 선택하고 클릭합니다. 오늘은 1984년에 Apple II용 타이틀로 발매된 「Beyond Castle Wolfenstein」를 선택해 보겠습니다.



제목과 발매연도, 토픽, 설명문이 표시됩니다. 또한 라이선스와 소스코드가 일반공개된 연도도 나옵니다.  Beyond Castle Wolfenstein의 경우, 라이선스는 Freeware, 소스코드가 일반에 공개된 연도는 발매되고 20년이 지난 2004년이었군요.



오른쪽 열의 「ZIP」을 클릭하면 소스코드를 ZIP 형식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Beyond Castle Wolfenstein의 오리지널 소스코드 용량은 162.9KB입니다.



다운로드한 「bcw_src.zip」을 Explzh 등의 다운로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압축을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용을 보려면 메모장 등의 텍스트에디터를 이용하면 됩니다.  



BCW.ASM을 메모장으로 열면 이렇게 표시되는군요.




Game Source Code Collection에는 총 241종의 타이틀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자료의 보존」이라는 목적으로 아카이브되어 있기 때문에 업로드된 게임은 모두 수십 년 전의 것들이지만, 옛날 게임이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배울 수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꼭 확인해 보시길.


미국은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나요? 일본시사관련

한도 가즈토시/1930년생.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 후 문예춘추에 입사. 전무이사를 거쳐 문필업으로 전향. 『일본의 가장 긴 하루』는 종전일을 묘사한 베스트셀러로 영화화되기도 했다.『노몬한의 여름』『쇼와사(昭和史)』『문사의 유언』 등 다수 저

「작년에 천황 폐하의 시종으로부터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전하에게 태평양 전쟁은 왜 일어났는지 알기쉽게 애기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은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으니까요. 나이 어린 분께 단순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리한 일입니다 라고 말이죠. 하지만 몇 번이나 부탁을 받아서, 그럼 요점만 말하겠습니다 하고 갔던 것이 8월 15일이었습니다」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친왕은 그야말로 다음 대의 천황가를 짊어지고 있는 존재다. 그 선생 역할로 선택된 사람이 쇼와 역사 연구가이기도 한 작가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氏)(89)였다.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가정교사”가 된 날이 「종전기념일」이었던 것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지금, 한도 씨가 그날의 일을 본지를 통해 밝혔다. 

「처음 아키시노노미야 부자와 만났을 때 말했습니다. 저는 도쿄의 서민 동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히”와 ”시”를 잘 구분해서 발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사히토라는 어명은 굉장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시사시토』라고 말하게 되니 오늘은 전하, 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요.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반이었지만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 간략하게 1시간 얘기했습니다. 

제가 얘기한 것 중 하나는 우리 일본은 ”내륙이 빈약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북쪽의 홋카이도부터 남쪽의 오키나와까지, 긴 해안선을 갖고 있으며 해안선 길이만 보면 일본은 세계에서 6번째로 깁니다. 하지만 정 가운데를 산맥이 통과하고 있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토지는 적고, 국민은 해안에 달라붙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해안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백 만 명의 군인이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일본은 전쟁이 터지면 절대로 방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원자력발전소가 해안 근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점점 지킬 수 없게 된 것이죠. 이런 일본이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며 지정학입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자리를 함께 한 아버지인 아키시노노미야가 어린 전하에게 『지정학(地政学)』이란 이렇게 쓰는 거란다 하고 종이에 한자로 써서 가르쳐 드렸죠」

휴식 시간이 되자 기코 비가 갖고 온 차를 마시면서 한도 씨가 「질문 있습니까?」라고 묻자 히사히토 전하는 손을 들고 「미국은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나요?」라고 질문했다. 

「질문을 듣곤 이거 꽤 답하기 어렵겠군, 하고 생각하면서도 정중히 답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요. 

요즘에는 그 전쟁은 어느 한쪽만 나쁜 것이 아니고, 상대편(미국)도 나빴다라는 설을 활발하게 주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전쟁 상황으로 끌고가기까지 일본의 책임이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버지・아키시노노미야도 질문을 하다

히사히토 전하에게 설명을 마쳤을 때 이번엔 아버지인 아키시노노미야가 「저도 질문해도 될까요?」라며 말을 꺼냈다. 

「아키시노노미야는 제 책을 읽었다면서 통수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통수권은 아주 어려운 개념입니다. 일본국헌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대일본제국헌법은 1889년에 공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군인칙유(역주: 1882년 메이지천황이 군인들에게 내린 칙서)』의 원형이 완성된 것은 1878년이었죠. 헌법보다 11년이나 앞섰습니다. 칙서에는 대일본제국육해군은 대원수인 천황 직속의 군대이다, 라고 대원수(=천황)의 지휘권을 통수권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즉, 적어도 일부 군인들은, 군대는 나중에 성립된 헌법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이지 시대부터 2차대전 이전 시대에는 천황은 천황폐하와 대원수폐하라는 두 가지의 역할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일본이라는 국가를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수권과 관련된 복잡한 이야기, 당시의 다양한 사례를 이해시키기 위해 결국 후반 1시간 반은 저와 아버지 아키시노노미야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도 전하는 졸지도 않고 옆에서 듣고 있었죠」

이렇게 아키시노노미야 부자가 근현대사의 선생 역할로 한도 씨를 초대한 배경에는 한도 씨가 전쟁 체험자로서 혹독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도 씨는 1930년 도쿄의 서민 동네인 무코지마 (현 스미다 구)에서 태어났다. 그 이듬해에는 만주사변이 발발했고 점차 일본은 전쟁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1940년 무렵이 되자 소년 한도는 동네 상조 조직이었던 「도나리구미(隣組)」가 감시 기관으로 변모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번 전쟁은 진다」라고 그의 아버지가 말하자 신고를 당해 한도 집안은 1년 동안 3번이나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도 있어서 구제 중학에 진학했어도 저는 군인 학교에는 절대로 가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육군유년학교니, 소년항공병이니 하고 열을 올리고 있었죠. 그래서『너는 비국민(非国民)이다』라고 자주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도 소년의 예상과 관계 없이 전황은 악화 일로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14살이던 1945년 3월 1일. 도쿄대공습으로 서민 동네는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다. 

「날뛰는 소이탄 사이를 이러저리 도망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공습이 끝난 후 타버린 들판 가운데에서 거기에 있던 유해를 정리했습니다. 

방공호 속이 그렇게 찜통이 될줄이야...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찜통이니 새까맣게 타버렸습니다. 엄청난 시체가 쌓였죠. 그걸 정리하니 맨 아래 있던 시체는 직접 땅에 닿아서 숯이 되었더군요. 이건 정말 가볍구나. 중학교 2학년인 제가 가볍게 들 수 있을 정도였죠. 

그렇게 유해를 옮기고 있자니 2시간 정도 후에 경방단 어른들이 『너희들 이제 그만해라. 이건 어른들이 할 일이야. 돌아가라』하고 쫓아내더군요. 돌아가라곤 했지만 사방이 타버린 들판이었지만요. 계속 유해를 처리했다면 요즘 말로 트라우마에 빠졌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런 애기는 40대 중반 이전에는 도저히 겉으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전쟁에 대해 애기하기 시작한 것은 업무차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그들은 거짓말을 곧잘 했습니다. 물론 성실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로 위장하는 사람, 자기 변명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정말이구나 생각하고 그대로 받아들였죠. 그런데 점점 취재를 하면서 다른 증언이나 기록을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이 그 때 그 전선에 있었다는 건 말도 안 된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걸 지적했더니 큰 소리를 치는 겁니다. 너 같이 전쟁을 모르는 철부지가 뭘 안다고! 하고 말이죠. 그래서 되받아쳤죠.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최전선에 가지 않고 남쪽 섬 기지에 있던 것 아니오! 그 무렵 우리는 본토 공습으로 소이탄을 억수로 맞고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파고드는 사람이 공부를 해서 상당한 지식을 쌓고 접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그 사람 본인이 말하고 있으니 틀림 없다 라는 경우는 있을 수 없어요. 누구나 자기 방어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걸 잊어선 안 됩니다. 

저도 필사적으로 도쿄대공습에서 살아남았지만 점점 그 당시를 떠올리는 것에 익숙해졌다고나 할까요. 정신을 차리고보니 아주 냉정하고 침착한 용기 있는 소년이 화재 속에서 도망나와 사람을 도우려고 강에 떨어져서.... 와 같이 멋있는 체험담만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실제로는 여기저기 널린 시체를 봐도 전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정신이 마비가 되었던 거죠.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쏙 빼놓게 되는 겁니다.  단, 글로 쓸 때는 장광설을 늘어놓기 힘들죠. 최근들어 자주 『체험을 계승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듣는데 사실 이야기를 계승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한도 씨는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국제연맹을 탈퇴한 이후

일본에는 외교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한도 씨는 그와 동시에 전쟁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외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제 생각으로는 1933년 이래, 일본은 외교라는 것을 제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1933년 3월, 운명의 국제연맹 탈퇴부터 일본은 점점 전쟁을 향해 돌격하여 패전을 맞이했습니다. 1952년에 독립했다고 해도 그날로부터 안보조약의 산하에 들어가 자신들의 미래를 미국에 통째로 넘겼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죠. 1933년부터 외교가 없었다는 것은 이제 일본 사람 중 누구 하나 외교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북방영토 폭언을 내뱉는 의원같은 사람이 나와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북방영토에 대해 말한다면 과거에 막부 해군을 이끌고 유신 후에 주러특명전권공사가 되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넓은 쪽(가라후토=사할린)를 러시아에게 넘기다니~ 하면서 엄청난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사실은 러시아 내에서도 이 결정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저렇게 그저 넓기만 한 아무것도 없는 곳을 양보받아서 어쩌겠다는 거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한 발판아니냐! 지시마가 일본 영토가 된다면 러시아 함대가 태평양으로 나갈 해로가 봉쇄된다!』하고 말이죠. 

에노모토는 근시안적인 시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땅이 장래에게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까지 예상하고 협상을 했습니다. 에노모토가 한 일이야말로 외교라고 할 수 있죠」

태평양전쟁 후 74년. 쇼와에서 헤이세이, 곡절이 있었지만 일본은 평화를 지켜왔다. 레이와는 어떨까? 

「요전에 세 달동안 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 때 퀴즈를 내겠습니다 하고 다음의 사지선다 문제를 냈습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은 나라는 어디일까요?  ①미국 ②독일 ③구 소련 ④호주』

그랬더니 50명 중에서 무려 13명이 미국이라고 답하더군요. 그 다음 주에 『내 수업을 들었는데도 자네 13명은 일부러 장난치는건가?』하고 물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손을 들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선 누가 이겼나요?』

이렇게 말하니까 우스개 소리 같습니다만 이게 결코 웃을 일이 아니죠. 앞으로의 레이와 시대는 분명히 이런 세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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